태만(怠慢)하면 아니 된다.
탐욕(貪慾)하면 아니 된다.
통정(通情)하면 아니 된다.
망언(妄言)하면 아니 된다.
눈을 감으면(蔽目) 아니 된다.
눈을 뜨면(開目) 아니 된다.
웃으면(譁笑) 아니 된다.
울면(落淚) 아니 된다.
화를 내면(慍怒) 아니 된다.
감(感)하고, 상(想)하면 아니 된다.
중희당(重熙堂)의 동쪽.
낮은 담벼락을 따라 걷다보면 소박한 중문이 하나 나왔다.
“여긴가?”
중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라온은 까치발을 들고 담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담장 너머의 너른 마당에 내시관복을 입은 어린 내시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맞게 찾아왔구나.
라온은 방(匚)자 형의 행랑채로 둘러싸인 마당으로 들어섰다.
내반원 부속의 이곳은 환적(宦蹟)에 오르지 못한 소환내시들의 생활공간이자 교육장이었다.
19살 이전의 소환내시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정식내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라온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던 어린 내시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더러는 호기심 어린 눈빛도 있었고, 더러는 경계하는 듯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라온이 주위를 둘러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메아리뿐이었다.
환영받지 못한 자리에 초대된 느낌.
머쓱해진 라온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뎅뎅.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에 운집해 있던 백여 명의 소환내시들이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하사받은 품계가 없는 임시직이었지만 나름의 서열은 분명히 있었다.
궁에 들어온 순서와 나이, 그리고 모시는 주인의 힘의 크기가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었다.
소환내시들은 길게 두 줄로 갈라섰다.
눈치를 살피던 라온도 열의 맨 끝으로 주섬주섬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교육장의 문이 열리고 초로의 환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순, 교육장 안에 있던 소환내시들의 등이 일제히 굽혀졌다.
“굽히세요.”
라온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멀뚱히 서 있자 옆에 있던 통통한 체구의 소환내시가 서둘러 손짓했다.
“네?”
“이렇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조아리세요.”
소환내시의 손짓에 따라 라온 역시 허리를 굽혔다.
뚜벅뚜벅뚜벅.
소환내시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진 내관은 양 옆으로 길게 도열한 어린내시들의 모습을 예리한 눈빛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정체불명의 말이 새어나왔다.
“통(通).”
낮지만 명료한 목소리.
통을 받은 소환내시는 한껏 의기양양해져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로도 정체불명의 말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약(略)!”
“조(粗)!”
“불통(不通)!”
약과 조를 받은 내시들 또한 진 내관의 뒤를 따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통을 받은 소환내시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긴 행렬을 이끈 진 내관이 드디어 라온의 앞에 섰다.
“네놈이 홍가 라온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일순, 소환내시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자선당의 환관, 홍라온.
그녀의 존재는 궁궐 사람들 사이에서 화젯거리였다. 귀신이 나온다는 자선당에서 벌써 며칠이나 버티고 있는 환관으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진 내관이다.
“조용!”
그는 단호한 한 마디로 소환내시들의 술렁거림을 단박에 잠재웠다.
잠잠해진 사위를 둘러보던 진 내관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라온을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복장 불통! 자세 불통! 시선 불통!”
불통이라 쓰인 세 장의 종이가 라온의 이마에 붙여졌다.
“큭큭.”
누군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진 내관의 매서운 눈초리에 쏙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어린 내시들을 돌아보던 진 내관이 고저 없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환관이란 무릇 궁실의 아침을 열고, 밤을 갈무리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왕과 왕족들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부름꾼이며 왕명부터 왕실의 가장 은밀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환관들은 궁실의 재산과 치안을 맡고 있으며 후궁들을 보호하고 궁녀들을 관리 감독 한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며 진 내관은 이마에 불통이라 쓰인 종이를 붙이고 있는 내시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마디로 말해, 환관이란 궁궐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너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통제이며, 자기 절제다. 하지만 너희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안 되는 놈들이다. 특히 너!”
진 내관이 라온을 검지로 가리켰다.
움찔 놀란 라온이 등을 꼿꼿이 편 채 진 내관을 응시했다.
“네 이놈!”
순간, 진 내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릇 환관이란 절대 등을 곧게 펴서는 아니 된다.”
진 내관의 지적에 라온은 서둘러 등을 굽혔다.
“우리는 왕과 왕족들의 그림자다. 그러니 항상 낮은 자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또한, 절대 소리 내어 걸어선 아니 된다. 언제나 시선은 발끝으로 향하며, 걸음을 걷는 보폭은 한 자를 넘어서는 아니 되느니.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좋다. 오늘 불통을 받은 자들은 기본자세로 교육장 마당을 돈다. 불통 한 장에 쉰 바퀴다.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 오너라.”
진 내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행랑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소환내시들이 종종 걸음으로 뒤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찍어내듯 똑같은 자세와 걸음걸이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