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의 가계는 불확실한데 고이왕은 보통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해 개루왕의 아들로 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모제(외삼촌)이라 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0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인가 여부에 이견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구수왕이 죽은 뒤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온조왕의 형 비류의 후손이라는 설과, 초고왕의 차남의 아들 혹은 손자라는 설이 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槐谷: 충청북도 괴산군)·봉산(烽山: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