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상담은 잘 하셨어요?”
몸을 실자마자 옆자리에 가방을 벗어던지는 찬열에게 동구가 물었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는데 묘하게 더웠다. 날씨가 문제가 아니고 그냥 속이 답답했다. 앞머리를 흔든 찬열이 힘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찬열이 그리 대답하고 나서야 차체는 출발했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다른 애도 아니고 네가 뭔 문제가 있다고 그걸 못 써? 3월 모의고사가 끝난 이후 담임은 기재해 제출하라며 나눠준 종이에 희망대학과 직업을 적어야하는 란이 있었다. 일주일의 기한을 줬는데 아직 제출하지 못한 건 찬열 뿐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찬열의 친구 중 한 명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학교 때부터 전교 수석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고 성격도 좋고 웬만한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데다가 가진 것도 많은 찬열이었으니 남들 눈에는 충분히 나올 법한 소리였다. 결국 찬열은 남들 몰래 담임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별 말이 오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말을 늘어놓은 건 찬열 쪽이었고 담임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요컨대 찬열의 고민은 요약하자면 이랬다.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사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뭘 잘못한 사람처럼 중얼대는 찬열의 말을 듣던 담임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찬열을 보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아. 설문지를 다시 찬열 쪽으로 밀어주며 너에겐 무기한의 시간을 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많이 생각해보라는 말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별 다른 소득이 없어서 그런지 찬열의 기분은 아주 바닥이었다. 그런 찬열의 심정과 달리 바깥은 개화한 벚꽃으로 만개했다. 묘한 우울감이 바닥을 찔렀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찬열은 운전을 하며 옆 차선과 눈치싸움을 하는 동구를 발견했다. 무어라 중얼거리던 동구는 기어코 창문을 내리고 상대편 운전수와 눈싸움까지 벌였다. 동구의 시커먼 양복 차림에 우락부락한 외양에 그제야 추월을 시도하던 상대편 차량이 속도를 줄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찬열이 턱을 괴었다. 동구는 지금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걸까?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들이 문득 떠올랐다. 찬열의 아버지는 모르는 이들 눈에는 유명 그룹의 CEO로 보이곤 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아버지는 여러 파벌을 가진 대형 조직폭력배의 간부였다. 지저분한 바닥과 달리 수면 위론 재벌 그룹처럼 여러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조직이었고 그 중 일부 계열을 도맡고 있을 뿐이었다. 동구는 그런 아버지가 일찍이 거둬 키운 덩치들 중 한 명이었다. 만약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동구는 뭔 일을 했을까. 갑자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대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계열사의 본사였다. 오늘은 아버지 지인 분과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목을 꺾어 젖혀도 끝을 보기 힘든 건물 아래에는 다른 덩치들이 서 있었다. 아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늦둥이를 위해 보낸 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다. 찬열은 한 번도 그게 배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입구에 차량이 서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챙겨든 찬열이 서둘러 몸을 내렸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떠세요, 키가 좀 더 크셨네요, 공부는 잘 하셨어요? 몸집이 찬열보다 두 배는 더 되는 사람들이 할 말 치고 간지럽기까지 한 말투에 언제나처럼 적응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려는 찰나였다.
“씨발, 다 비켜!”
입구 앞에 세워진 건물 기둥 중 한 곳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정장을 입은 주변 사람들에 비해 이질적인 차림새를 한 남자 한 명이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손에 보기만 해도 섬뜩한 식칼이 들렸다는 걸 안 순간에는 이미 코앞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당황한 덩치들 사이를 재빠르게 파고든 깡마른 남자의 표적은 찬열이었다. 놀란 찬열이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꾹 감았을 때였다.
“악!”
짧게 울린 비명소리는 찬열의 것이 아니었다. 찬열에게 끼친 것은 몸을 관통하는 통증이 아닌 쇳날이 대리석 위를 구르는 소리였다. 놀라서 뒤로 넘어진 찬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제게 달려들었던 남자는 저돌적으로 뛰어오던 조금 전과 달리 바닥에 처박힌 상태였다. 그리고 그 등 위에는 낯선 얼굴의 소년이 올라타 있었다. 순식간에 괴한의 팔을 꺾어 제압한 정체 모를 소년의 등장에 찬열은 물론 주변 덩치들 또한 놀란 눈치였다. 소년이 익숙하게 뒷목을 내려쳐 남자를 기절시킬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뒷덜미를 가격하는 일격에 발악하던 남자의 몸이 축 늘어지자 그제야 손을 털고 일어난 소년이 옆자리에 뒹굴고 있는 식칼을 발끝으로 길게 밀어냈다. 잘 갈린 날이 바닥을 긁으며 구석으로 밀렸다. 단정한 흰 남방 차림의 소년이 볼썽사납게 주저앉아 있는 찬열을 내려 보았다. 그리곤 앞머리를 길게 쓸어 올리는 그 행동을 찬열은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
“우리 애가 김 이사 아들한테 큰 신세를 졌다고 들었네. 이거 고마워서 어떡하지?”
호탕하게 웃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말했다. 맞은편에는 아버지의 소개로 이전에도 몇 번 만나 뵌 적이 있는 김 이사와 처음 보는 그의 아들이 앉아 있었다. 그 김 이사의 아들은 좀 전 본사 입구에서 찬열을 구해준 그 소년이기도 했다.
찬열은 당사자를 두고 굳이 다시 얘기를 꺼내드는 아버지의 언사에 얼굴을 붉혔다. 일이 일어났던 당시엔 큰일이 났을 뻔했단 생각에 심장이 벌컥거렸는데 지금은 부끄러워서 벌렁거렸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평소 그렇게 운동신경이 뒤떨어지는 편도 아니었는데 병신같이 나자빠져 허우적대기만 했던 게 생각이 나 괜히 창피스러웠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초면의 또래한테 구해지기까지 했으니. 홧홧해진 귀를 괜히 만지작댄 찬열이 애꿎은 눈앞의 고깃덩어리만 뒤적였다.
“별 일 아닙니다. 마침 저와 아들이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던 차라… 아드님이 다치지 않으셨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이죠.”
“거 참. 이사님께는 못 보일 일을 보였군요. 아무래도 요즘 건설 현장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터라 아랫놈들 원성이 크긴 했지만 이렇게 무식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습죠.”
아버지는 고기를 껌 같이 씹으며 말했다. 건설현장. 찬열은 괴한이 입고 있던 조끼 유니폼을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좋지 못한 일로 보복의 화살이 아들인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란 걸 눈치 챘다. 이제 겨우 메인이 나왔는데 벌써부터 입맛이 떨어졌다. 찬열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일찍 내려놓았다. 긴장을 하면 습관적으로 물을 찾는 버릇 때문에 잔을 찾아 쥐었지만 이미 다 마셔버린 잔이 비어있었다. 조금 귀찮아진 표정으로 웨이터를 찾아 부르려던 찰나였다.
“여기 물 좀 채워주세요.”
고개를 돌리던 찬열보다 좀 더 앳된 목소리가 더 빨랐다. 찬열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잔이 빈 건 찬열 뿐이었고 소년은 잔에 입도 대지 않아 이미 가득한 상태였다. 설마 나 때문에? 찬열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공손하고 딱딱한 말투는 아직 덜 자란 목소리에는 사뭇 어울리진 않았다. 예의바르게 찬열의 아버지에게까지 고개를 까딱인 소년이 홀 쪽으로 나갔다. 이 와중에 두 아버지는 소년을 두고 아이가 참 잘 자랐네 어쩌네 하는 겉치레적인 칭찬을 나누는 중이었다. 멀어지는 모습을 응시하던 찬열이 코너를 돌며 사라지는 걸 보곤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르지만 소년을 따라가야 할 거 같았다. 좀 전의 소년에 비해 조금 방정맞게 양해를 구한 찬열이 빠른 걸음으로 같은 복도로 나갔다.
소년은 같은 층을 두고 굳이 아래층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 일을 보지도 않고 바로 손을 씻는 그 뒷모습과 간격을 두고 있던 찬열은 잠시 그를 부를까말까 망설였다.
“할 말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소년이 빨랐다. 벽 뒤로 몸을 감추고 있던 찬열은 그 목소리에 결국 소년이 서 있는 세면대로 다가갔다. 소년은 손의 물기를 털어내며 눈으론 찬열을 돌아보았다. 어리다. 찬열이 소년의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고등학생인 본인도 어른이라 하기엔 웃겼지만 소년은 그보다 더 앳됐다. 머리 하나 차이 날 정도로 작았고 목소리도 아직 변성기를 채 다 겪지 않은 듯 했다. 까무잡잡하긴 하지만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얼굴에 찬열은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뭔 말을 하려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세면대 옆에 설치된 페이퍼타올을 뽑아든 소년이 찬열의 침묵에 눈썹을 까딱였다.
“졸졸 쫓아 오길래 뭐 급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졸졸 쫓다니. 그런 거 아냐.”
“아니면 말고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 조금 얄미워보였다. 찬열은 괜히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었다.
“아씨. 너 말이야.”
“…….”
“너, 너.”
“저 왜요.”
“…몇, 몇 살이냐?”
하? 찬열의 질문에 소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뭔 쌩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노골적인 표현에 찬열이 방금 전보다 더 오래 뒷목을 만지작댔다. 시선을 슬쩍 피하는 찬열의 행동에 소년이 코웃음을 쳤다.
“나이도 제대로 모르면서 초작부터 반말한 거예요?”
“아니, 나는….”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알아서 알아보세요.”
물기를 닦아 축축해진 타올을 쓰레기통에 던진 소년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에 비해 웃음기라곤 존재하지 않는 눈이 찬열을 얄밉게 쏘아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아. 이게 아닌데. 찬열은 화장실 밖으로 성큼 걸어나가는 그 뒷모습을 쫓았다. 저보다 키도 작은 게 걸음은 어찌나 빠른 지 화장실과 홀을 잇는 긴 복도를 걷는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냉정하게 돌아서버리는 뒷모습을 보고나서야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기억한 찬열이 뛰어서라도 다시 소년을 잡고자 했다.
“도련님 여기서 뭐하세요?”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동구가 먼저 찬열을 불러 세웠다. 생각도 않던 이의 등장에 찬열이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소년과 찬열은 레스토랑보다 한 층 내려온 터였다. 1층 홀에서 대기를 타고 있던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