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루 돌난간 하엽동자기둥에 돌란대를 얹고 엄지기둥에 불가사리와 용 등의 법수를 세운 형식이다.
동궁 일곽
동궁은 왕위 계승관자인 세자의 궁전을 가리키는 말로서 세자에 대한 경칭으로도 쓰인다. 동궁은 세자를 제왕으로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모두 갖추도록 설계되었으니 세자와 세자빈의 처소, 세자궁에 떨린 내관(內官) 들의 처소, 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 를 받는 곳이다. 또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서연(書筵)이나 시강(侍講)등의 강학(講學)을 받으며 세자를 위한 책고(冊庫) 와 세자를 호위하는 곳 등이다. 이러한 시설은 각각 정궁의 연조, 치조,외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도 이러한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동궁의 시설은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곧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동궁이 없었으며, 창건 직후에 태조가 여덟째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을 때에도 동궁이라 부를 만한 건물을 따로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미 태조 1년(1392) 7월 관제 (官制) 를 새로 제정할 때에 세자 관속(侍衛) 을 두어 강학과 시위(侍衛) 들의 일을 맡게 한 시실, 태종 18년(1418) 6월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따로 설치하여 세자 관속을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로 분설한 사실 등으로 보면 이미 동궁이 건립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후 왕자의 난, 정종(定宗, 재위 기간 1398-1400년)의 개경 천도 (1399년), 태종 5년 (1405)의 한성 환도 등의 정치적 격변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른 동궁 시설이 필요하였다.그러나 기록으로는 경복궁에 동궁이 처음 마련된 것이 세종 9년 (1427)이다. 세종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복궁에서 보내면서 법궁 체재를 완비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동궁을 제도화할 필요를 절감하고 왕 9년에 경복궁 정전의 동쪽 넓은 자리에 서연(….)과 시강(….)을 받는 장소인 자선당을 찬건하였다. 또 세종 25년(1443) 5월 12일에는 세자가 백관의 조회(ฮันจา)를 받을 장소로 계조당(ฮันจา)을 창건하여 이때부터 내당(ฮันจา)인 자선당과 정당(ฮันจา)인 계조당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계조당은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에게 섭정을 시키기 위하여 1422년 첨사원(섭정 보좌기관)까지 설치한 뒤에 창건한 시설이었기 때문에 동궁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라 섭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필요한 시설이았다.
단종 즉위년 6월에 문종의 유지를 받들이 계조당과 승화당을 헌 것은 섭정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세조 7년(1461) 11월에는 수리도감(修理都監)을 설치하여 경복궁을 크게 개수하면서 세조 8년 12월에는 무슨 까닭인지 동궁의 자리를 옮겨 궁성 서북쪽 간의대 남쪽에 새로 지었고, 성종 17년(1486)에는 창덕궁 안에 동궁을 창건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