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周書)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7]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8]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9]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10]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11]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12]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