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는 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의 유적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 유적이 발견되는 지점 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살펴보더라도 햇빛과 물 등 자연조건이 매우 좋은 지점들이다. 자연 조건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였을 고대인들은 이러한 점에 민감하게 작용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북한강 유역에는 넓은 평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계를 따라 남북을 잇는 교통로가 발달해 있었다. 삼국시대의 춘천에 어떠한 세력이 존재했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기원전 18년경에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에 국가를 세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이후에 북한강 중상류지역인 이곳에 대한 삼국의 각축이 있었을 것을 쉽게 상정할 수 있다. 특히 삼국시대 한강유역에 대한 패권의식이 치열하던 시기에 백제는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고구려는 한강유역이나 남한강 유역의 평야지대로 진출하기 위하여, 신라는 죽령과 조령을 지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북한강의 수계를 따라 진출하였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던 시기이기 때문에 춘천지역 또한 지속적으로 어느 한 국가의 영역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후에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기까지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은 교차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춘천 지역은 삼국의 두드러진 지배 외에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토착의 정치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도 상정해볼 수 있다. 먼저 백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는 부여 계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어 한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국력을 키워나가면서 기원 후 1세기에는 마한을 공격하고, 영역을 확장시켜 나아갔다. 이러한 백제는 한강 하류에서 영역을 확장하는 한편 북한강 중 상류 지역에 있던 춘천 지역으로도 영역을 확장하였다.